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국제그룹 해체 사건 (문단 편집) == 전개 == >'''[[괘씸죄|첫째는 내가 미워서고]], 둘째는 내 것 뺏어다가 주고 싶은 사람에게 나눠주려고 그랬겠지요.''' > - [[양정모]] 회장의 말. 원 출처: [[월간 말]] 1993년 10월호 <심층추적: 전두환과 국제 인수 3사의 검은 뒷거래>. p46. 1983년에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순직자 유자녀를 위한 장학재단으로 설립된 [[일해재단]]의 연간 운영비용조로 당시 돈 100억원(3년에 걸쳐 300억원)을 확보하기 위해 청와대에서는 재벌을 비롯한 대기업들에게 자발적으로 모금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게 된다. 이 때 [[현대그룹]] 및 [[삼성그룹]]이 15억을, [[LG그룹|럭키금성그룹]] 등이 12억을 부담하기로 결정했는데 사실상 이들 다음으로 거대한 기업 규모를 가진 국제그룹의 오너인 양 회장이 5억의 어음으로 퉁치려고 하자 [[일해재단]] 초대 이사장인 [[최순달]][* [[전두환]]과 대구공고 동기이며, 유명한 과학자이다. [[대한민국]] 최초의 인공위성인 '우리별' 발사를 주도한 인물.]이 면박[* 아들은 [[미국]] 유학 가서 [[볼보|외제차]] 끌고 다닌다고 들었는데 나라를 위한 일에는 야박하다고 비아냥조로 면박을 준다.]을 준다. [[http://www.ddanzi.com/doctuPolitics/1183946|#]] 그 뒤 1984년 10월 하순, 새마음심장재단 성금 및 새마을성금을 기부할 때도 달랑 3억으로 때우면서 이미 전두환의 눈총을 받은 상태였다. 양 회장이 [[월간 말]] 1993년 10월호에서 낸 증언에 따르면, 이 때 만찬 자리에서 그는 전두환 내외 앞에 갑자기 10대 재벌에 속하지 않은 그룹총수 부부가 앉아 있어 의아해했다. 이후 [[전두환]]은 총 30억원[* 새마음심장재단에 20억, 새마을성금 10억원을 각각 냈다.]의 성금을 낸 동국제강 장상태 회장(1927~2000)에게 "장회장은 회사도 조그마한데 성금을 30억원이나 내셨습니다. 참 훌륭한 기업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는 바람에 같이 참석한 재벌총수들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을 뿐더러 분위기도 무거웠다. 그 증거로 10월 8일자 청와대 성금접수일지에는 '동국제강 새마음심장재단 20억원, 새마을성금 10억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반면 국제그룹은 그때까지 3억원밖에 내지 않아 청와대 성금납부실적 30위에 기록된 상황이었다. 이에 후계자로 내정된 사위인 김덕영 부회장은 이 때 꺼림칙했던 것도 있고 회사의 규모에 비해 5억은 눈치가 보인다며 10억원 정도로 맞추는 게 좋지 않겠냐고 설득하기도 했지만 결국 양 회장이 11월경에 청와대 비서실의 전화를 받고서야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결정적으로 이렇게 눈치보이는 모금액을 현금이 아닌 [[어음]]으로 제공한 것이 화근이 되어 전두환의 미움을 사면서[* 이쯤되면 양정모가 대놓고 전두환에게 뻐큐를 날린거나 다름없는데 보통 [[어음]]은 갑을관계에서 을이 어쩔 수 없이 받는 것이다.] 마침내 회사 공중분해의 단초가 되고 말았다. 또, 당해 초에 그가 일해재단 모금차 방문한 최순달에게 모금액수가 많다고 불평을 하거나 그해 여름에 준공된 양산 통도사 골프장과 관련된 새마을성금을 10억 연수표로 내서 이미 권력층에게도 눈총을 받았다. 그 후 12월 22일, 청와대에서 다음해 2월 12일에 있을 총선에 대비해 재계의 협조를 구하려는 차원에서 재벌 총수들을 소집해서 만찬을 여는데 이 자리에 양 회장이 사고가 생겨 늦게 도착하고 만다. 부산에서 스케줄에 맞추어 서울행 항공편에 탑승했는데 때마침 내린 폭설로 항공기가 연착하면서 늦었다고. 헐레벌떡 뛰어들어온 양 회장에게 전두환이 했던 말이 가관이다. "우리 국제 양회장님은, 어디 외국이라도 갔다오셨나요?" 이에 양 회장은 도리어 "부산지역 경기가 낙후해 민정당 지지기반이 취약하니 임해공단을 건설해달라"는 말을 불쑥 꺼냈다. 결국 그의 눈치 없는 말 한 마디가 국제그룹에 화가 될 줄은 몰랐고, 5일 만에 제일은행이 어음 78매 432억원을 부도 처리시킴으로써 국제그룹은 1차 부도사태를 맞았다. 국제그룹 출신 사이에 도는 이야기에 따르면 양 회장에게는 7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런데 [[미국]] 유학 중이던 막내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여 양 회장이 즉시 [[미국]]으로 갔는데, 하필이면 이 때 [[전두환]]이 재벌들을 소집했다는 것.[* 이마저도 출국금지로 묶여서 못 갈 뻔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아들이 머나먼 타지에서 사경을 헤메는데 아버지를 못 가게 막는 건 그 악랄한 [[신군부]]조차도 너무 인륜에 어긋난다 싶었는지 출국을 허가해줬지만 아들의 임종은 지키지 못했다.] 청와대 측은 5공화국 후반의 권력 장악을 위해 1985년 2월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의 압승이 절실한 시점이었다. 김영삼의 텃밭인 부산 지역이 선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변수였는데, 이 부산 지역의 표를 얻고자 전두환은 국제그룹의 기반인 부산으로 직접 내려가 [[양정모(1921)|양정모]]에게 선거를 위해 힘을 쓸 것을 부탁한다. 하지만 이 때 양정모 회장은 아들의 제사를 위해 전두환을 만난 바로 다음날 부산을 뜨게 되고 이 일로 전두환은 "대통령인 내가 부산에 있는데 멋대로 여길 뜨다니!"라며 또 한 번 분노한다. 이렇게 전두환한테 찍힐대로 찍힌 상황에서 2월 총선 직전 [[김대중]]이 갑자기 귀국하자 막판 선거 유세가 치열해졌고 결국 청와대측이 우려한대로 총선에서 [[김영삼]]을 비롯한 민추협계 세력이 승리를 거둔다. 특히 부산 지역에서는 모든 선거구에서 [[신한민주당]] 의원이 당선되고 [[중선거구제]]였음에도 3개 선거구에서 [[민주정의당]] 후보가 3위 이하로 낙선하며 선거의 판세를 뒤집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것이 전두환의 심기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드는 결정타가 되어 버린다. 시기를 볼 때 선거 결과가 나오자마자 분노를 폭발시키면서 잠시의 지체도 없이 국제그룹을 해체해 버리기로 결정한 듯하다. 국제그룹복원본부 측의 의견은 아래와 같다. >84년 당시 전두환은 위기에 몰려 있었다. 양 김씨의 민추협이 바람을 타고 있는 이 같은 상황에서 2.12 총선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막대한 정치자금이 필요했다. 하지만 전반적인 불황 때문에 10대 재벌에서는 수금이 잘 안됐다. 이때 재벌순위가 저 아래인 재벌 중에서 회사규모에 걸맞지 않은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하며 권력에 밀착한 재벌들이 있었다. 총선 때 이들에게 비자금을 받아 쓴 전두환은 이들에게 나눠줄 '''먹이'''가 필요했다. 그때 걸려든 것이 국제그룹이었다. > - 원 출처: [[월간 말]] 1993년 10월호 <심층추적: 전두환과 국제 인수 3사의 검은 뒷거래>. p48. 국제그룹의 부도는 자금난에 빠진 이 그룹에 대해 제2금융권에서 2,000억원이 넘는 여신을 회수한 게 도화선이 됐다. 그러나 이미 그룹 해체 결정 2개월 전인 1984년 12월 23일에 정부가 국제그룹에 대한 완매채 대환 지원방침을 철회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바가 있어 '''정부의 눈 밖에 났다'''는 사실이 잘 알려진 상황이었으므로 어느정도는 예고된 위기였다. 실제로 국제그룹은 80년대 초반에 무리한 확장과 당해 초 계열사인 연합철강 창업주인 권철현과의 경영권 분쟁 등으로 소송비를 쓰는 바람에 유동성이 굉장히 부족해져서 주거래 은행인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제일은행]]으로부터 여러차례 구제금융을 받기도 했고, 부채비중이 900%를 넘어 당시 재벌로는 부채비중이 높은 편이었다.[* 당시 평균이 500%대라고 한다. 참고로 부실공기업이라며 온갖 비난을 다 받는 [[한국토지주택공사]]의 2011년 상반기 기준 부채비율이 550% 정도다. 하지만 1980년대는 엄청난 호황기로 경제가 수직성장하던 시절이었으며, 부채비율이 높다고 내일모레 부도날 상황은 아니었다.] 부채비중이 조금 높은것을 빼면 몇몇 부실 계열사 매각으로 충분히 회생이 가능했고 당시 [[금융감독원|은행감독원]]과 주거래은행이던 [[SC제일은행|제일은행]]도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전두환한테 찍혀 버리는 바람에 결국 1985년 2월 21일 오전 10시에 재무부에 의해 부실기업이라는 오명을 쓰고 그룹의 전면 해체 결정이 발표되며,[* 주거래 은행이자 채권단 대표 은행인 [[한국스탠다드차타드은행|제일은행]]조차도 해체 결정 발표 전날에 통보를 받았을 정도로 국제그룹 해체 결정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해 7월부터 21개 계열사들이 모두 [[청산]], 다른 기업들로 합병되며 정리된다. 2월 총선 결과가 나오고 나서부터 청와대 측에서 국제그룹에 은행 채권단을 보내는 등의 직접적인 액션을 취할 때까지 걸린 시간은 '''2일''', 그리고 국제그룹 완전 해체가 발표까지 '''고작 1주가 조금 넘는''' 시간이 걸렸다. 이때 제일은행장 [[이필선]]은 오전 10시 30분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재무부가 쓴 <국제그룹 정상화대책>이란 제하의 유인물을 마치 제일은행에서 작성한 것인 양 열심히 낭독했다. 훗날 국제그룹 해체 이유에 대해 김만제 당시 재무부 장관은 한국일보 <재벌이력서> 연재 당시 아래와 같이 말했다. >'''사업 운이 따르지 않은 결과다.''' 벌여놓은 일들이 수습되지 않았고 부실 구멍은 자꾸 커져갔다.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었다. 한푼 두푼 넣어서 될 상황도 아니었다. 또 그런 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통화량을 그만큼 늘려야 한다는 제약도 있었다.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해체당하게 된 것이 국제다. >- 원 출처: <재벌이력서(이종재 저)>. 한국일보사. 1993.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